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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도예 선구자, 신상호 작가
신상호 작가의 스튜디오에선 유럽에서 수집한 녹슨 산업 기기들과 직접 빚은 분청 항아리의 조화가 자연스럽다. 김정훈 기자
11월 27일부터 2026년 3월 릴게임모바일 2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신상호: 무한변주’ 전시가 열린다.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의 60여 년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통 도자에서 조각·회화·건축 등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거침없이, 끊임없이, 경계 없이 흙의 가능성을 확장해온 신상호(78) 작가의 작품 여정과 ‘무한변주’라는 전시명은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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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60년 작품 세계 회고전 1960년대 대학생이던 그는 경기도 이천에서 장작 가마를 직접 운영하며 전통 도예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대 미국 센트럴 코네티컷주립대 교환교수 시절 미국 추상표현주의 조각을 경험한 후에는 ‘도자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2000년대에는 김해 클레이아크 초대 관장을 골드몽게임 지내면서 건축과 도자의 결합을 실험했고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의 밀레니엄 타이드, 금호아시아나 사옥(현 콘코디언 빌딩), 서초동 삼성타운 등의 외벽에 ‘구운 그림(fired fainting)’을 활용한 도자 타일을 설치했다. 요즘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흙판을 금속 패널에 붙이고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도자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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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그림-마스크’.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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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시작되기 며칠 전, 경기도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신상호 도예 스튜디오를 찾았다. 백자·청자·분청 항아리부터 도자 타일, 도자 회화는 물론 그의 유별난 수집벽으로 꽉 채워진 공간,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이 ‘신상호 킹덤’이라 부르는 곳이다.
Q : ‘구운 그림’이라는 용어가 생소합니다. A : “흙을 캔버스처럼 사용해 다양한 색채를 표현한 것인데 이걸 이용해 도자와 건축이 만나는 도자 타일을 만들었죠. 50×50㎝ 크기 타일에 여러 가지 색을 입혀서 건축 외장재로 사용한 건데, 분리와 재설치가 가능하도록 알루미늄 판 위에 타일을 붙이느라 접착제를 따로 개발해 특허도 받았어요.”
Q : 공예와 건축을 접목하고, 자연 소재인 흙과 과학을 결합했네요. A : “고민을 해결할 때 과학의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죠. 모두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작 가마를 사용할 때, 가스 가마를 국내에 처음 도입한 것도 나에요. 성공률이 높아지니까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죠. 홍대 교수로 재직할 때 도예과에 컴퓨터 시설도 들여놨어요. 당시 부총장이 ‘공과대학에도 없는 컴퓨터를 도예과에 설치하는 게 말이 되냐’며 예산을 안 주길래 삼성전자 정재은(신세계 그룹 정용진 회장의 아버지) 사장을 찾아갔는데 흔쾌히 지원하겠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도예가들이 컴퓨터로 작업하는 일이 자연스럽죠.”
Q : ‘전통 도자에서 현대 조각으로 변화하자’ ‘손맛과 과학의 힘을 결합하자’ 할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곱진 않았겠어요. A : “‘이단자’ ‘배신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또라이’라는 소리도 듣고.(웃음) 하지만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내 길을 걸었어요. 돌아봐도 내 선택이 맞았다는 생각이에요. 과거에 뿌리를 두되 언제나 미래로 전진해야죠. 길이 없는 숲에는 먼저 걸어가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필요해요.”
Q : 대학 때부터 가마를 운영하시다니 부잣집 아드님이셨나 봅니다. A : “부모님이 서울 방학동·창동 일대 유지이긴 하셨지만 뜻대로 안 되는 장남 때문에 실망이 크셨어요. 현장 수업 차 갔던 이천 가마에 눌러 앉아버린 아들을 40여 일 만에 찾아낸 부모님은 ‘옹기쟁이가 뭐냐’며 화를 내셨지만 결국 장작 가마를 사주셨죠. 이후부터는 알아서 하라며 일절 도와주지 않으셨어요. 가마 운영을 위해 화병을 만들어 종로 꽃집에 내다 파는 게 내 일이었죠.” 1975년 이천에서 부곡리로 공방을 옮기고, 가스 가마를 도입해 소성(흙을 성형한 도자기를 고온에서 구워 형태와 성질을 완성하는 과정) 성공 노하우를 쌓으면서 큰 돈을 벌었다. 홍대 도예과 후배인 아내 한윤숙씨는 생활 도자기를 현대풍으로 디자인했는데, 78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지사 대표 한창기씨에게 납품했던 백자 반상기는 혜곡 최순우 선생이 추천하고 ‘뿌리깊은 나무’가 판매를 보증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공방 직원 수는 130여 명이었다. 신 작가는 이 시기 개인전을 여럿 치르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높였고, 공방을 찾는 선후배 예술인들과 교류도 활발했다.
Q : 전시 작품 중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그린 도자도 보이더군요. A : “박서보·김창열·윤형근 등 많은 분들이 사랑방처럼 공방에 들렀죠. 운보 김기창 화백은 40여 일간 머물면서 도자에 그림을 그리셨고, 장욱진 선생은 술 드시러 오셨다가 취흥에 그림을 그리셨죠. 박서보 선생님과는 논쟁도 여러 번 했는데, 내가 그랬거든요. ‘내 보기엔 딱 벽지인데, 그게 무슨 그림이냐’고.(웃음) 박 선생이 연필로 선을 긋는 초기 묘법에 전념하실 때인데, 처음엔 불쾌해 하시더니 얼마 안 있어 한지의 물성을 발견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당시 예술가들이 들러 차도 들고 술도 마시고 서로의 아픈 곳을 찌르며 자극 받았죠. 어느 날은 박서보 선생이 제가 만든 달항아리를 번쩍 들어서 말도 없이 차에 싣고 가버린 적도 있어요.(웃음) 맘에 드셨던 거죠. 지금도 박서보 미술관에 그 달항아리가 있어요.”
Q : 이번 전시에는 개인 수집품을 소개하는 ‘사물과의 대화’ 공간이 있습니다. A :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뭔가 수집하는 게 병이에요. 일주일 동안 열심히 작업하고 일요일에는 청계천 황학동 시장에 나가는 게 유일한 낙이자 취미죠. 95년에 영국 왕립예술대학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는 런던의 앤티크 시장 포토벨로에 꽤나 다녔죠.” 그의 수집품은 유럽에서 컨테이너로 실어올 만큼 방대하다. 산업혁명 전후에 사용됐던 폐군용 물자와 오래된 산업기기, 유럽에 수출된 중국 청화백자 등 다양하다. 심지어 미사일이나 대포 탄알도 있다. 다른 문명, 다른 물성의 사물들과의 대화는 신 작가가 흙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영감을 얻는 원천이다.
Q : 녹슨 산업기기들을 모은 이유가 있나요. A : “이 동네가 군사지역이라 폐군용 물자에 관심이 먼저 갔어요. 알고 보면 군복을 비롯해 군용 제품들이 소재도 좋고 퀄리티가 좋아요. 이걸 더 파고 들다 보니 산업혁명하고 연결이 됐죠. 그때 만든 물건들이 디자인이 정말 좋거든요. 누군가 내 수집의 핵심을 묻는다면 ‘파티나(patina)’, 녹슨 상태의 것을 좋아한다고 답하죠. 그건 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이니까요. 완전히 ‘새로운 것’ ‘우리만의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은 섞이면서 변화하고 발전하죠.”
Q : 수집품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은 뭔가요. A : “당연히 아프리카 공예품들이죠. 나를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였으니까요.”
Q : 작가님에게 아프리카는 어떤 의미인가.
A : “예술의 본류를 찾은 곳이죠. 서양미술이 19세기 말부터 더 이상의 철학적 콘텐트를 찾지 못했을 때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길을 찾죠. 피카소도 그렇고. 이후 현대 미술은 교육을 통한 지적인 아름다움과 자연 그대로인 원시적인 아름다움 두 갈래로 성장하고 있어요. 흙은 색깔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한 소재에요. 색이 자유롭지 않으면 작가의 표현도 한계에 부딪치죠. 색이라는 언어를 자유롭게 쓰려면 어떡할까 고민할 때 아프리카 원시미술을 발견했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옷에도, 몸에도, 물건에도 자유롭게 색을 그리는 모습이 강한 자극을 줬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작업한 ‘아프리카의 꿈-토템’ 시리즈.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95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린 아프리카 관련 전시를 보고 그는 바로 아프리카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러기를 수십 번. 그의 스튜디오에는 작은 아프리카 박물관을 차려도 충분할 만큼 수많은 공예품이 쌓여 있다. ‘아프리카의 꿈’ 연작 등 작품 활동에도 원초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반영됐다.
박서보·김창열·장욱진 등 공방 단골
Q : 남은 생애는 느티나무를 그리며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A : “이 동네에 처음 들어올 때 느티나무 수십 그루를 심었어요. 나를 50년이나 지켜본 느티나무들이 고마워 이걸 ‘그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자 생각했죠. 어느 날 느티나무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잎 사이로 빛이 반짝이면서 색이 계속 변하더군요. 구운 흙 위에 아크릴 물감을 떨어뜨려 색을 입히는 ‘그림’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도자 회화 ‘묵시록’ 시리즈의 시작입니다.”
Q : 여러 장르를 경계 없이 오가는 추진력은 어디서 올까요. A : “누구는 평생 점만 찍고, 누구는 평생 물방물만 그리는데(웃음) 기질적으로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계속 또 다른 걸 찾아내고, 길이 없으면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평생 한 우물만 파도 좋겠지만, 흙은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니 아이디어도 고갈시키지 말고 계속 전진하자며 지금까지 온 거죠.”
Q : 대규모 회고전을 앞둔 소회가 궁금합니다. A : “6.25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도예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요. 전통 도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 추상표현주의로 가기 위해 내가 어떤 도전을 했는가 지켜보면서 후배들은 또 새로운 생각을 하겠죠. 답은 늘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앞으로 나갈 때 찾아지더라고요.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선생은 내 안에 있어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기자 admin@slotnara.info
한국 현대도예 선구자, 신상호 작가
신상호 작가의 스튜디오에선 유럽에서 수집한 녹슨 산업 기기들과 직접 빚은 분청 항아리의 조화가 자연스럽다. 김정훈 기자
11월 27일부터 2026년 3월 릴게임모바일 2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신상호: 무한변주’ 전시가 열린다.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의 60여 년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통 도자에서 조각·회화·건축 등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거침없이, 끊임없이, 경계 없이 흙의 가능성을 확장해온 신상호(78) 작가의 작품 여정과 ‘무한변주’라는 전시명은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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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60년 작품 세계 회고전 1960년대 대학생이던 그는 경기도 이천에서 장작 가마를 직접 운영하며 전통 도예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대 미국 센트럴 코네티컷주립대 교환교수 시절 미국 추상표현주의 조각을 경험한 후에는 ‘도자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2000년대에는 김해 클레이아크 초대 관장을 골드몽게임 지내면서 건축과 도자의 결합을 실험했고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의 밀레니엄 타이드, 금호아시아나 사옥(현 콘코디언 빌딩), 서초동 삼성타운 등의 외벽에 ‘구운 그림(fired fainting)’을 활용한 도자 타일을 설치했다. 요즘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흙판을 금속 패널에 붙이고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도자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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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시작되기 며칠 전, 경기도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신상호 도예 스튜디오를 찾았다. 백자·청자·분청 항아리부터 도자 타일, 도자 회화는 물론 그의 유별난 수집벽으로 꽉 채워진 공간,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이 ‘신상호 킹덤’이라 부르는 곳이다.
Q : ‘구운 그림’이라는 용어가 생소합니다. A : “흙을 캔버스처럼 사용해 다양한 색채를 표현한 것인데 이걸 이용해 도자와 건축이 만나는 도자 타일을 만들었죠. 50×50㎝ 크기 타일에 여러 가지 색을 입혀서 건축 외장재로 사용한 건데, 분리와 재설치가 가능하도록 알루미늄 판 위에 타일을 붙이느라 접착제를 따로 개발해 특허도 받았어요.”
Q : 공예와 건축을 접목하고, 자연 소재인 흙과 과학을 결합했네요. A : “고민을 해결할 때 과학의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죠. 모두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작 가마를 사용할 때, 가스 가마를 국내에 처음 도입한 것도 나에요. 성공률이 높아지니까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죠. 홍대 교수로 재직할 때 도예과에 컴퓨터 시설도 들여놨어요. 당시 부총장이 ‘공과대학에도 없는 컴퓨터를 도예과에 설치하는 게 말이 되냐’며 예산을 안 주길래 삼성전자 정재은(신세계 그룹 정용진 회장의 아버지) 사장을 찾아갔는데 흔쾌히 지원하겠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도예가들이 컴퓨터로 작업하는 일이 자연스럽죠.”
Q : ‘전통 도자에서 현대 조각으로 변화하자’ ‘손맛과 과학의 힘을 결합하자’ 할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곱진 않았겠어요. A : “‘이단자’ ‘배신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또라이’라는 소리도 듣고.(웃음) 하지만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내 길을 걸었어요. 돌아봐도 내 선택이 맞았다는 생각이에요. 과거에 뿌리를 두되 언제나 미래로 전진해야죠. 길이 없는 숲에는 먼저 걸어가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필요해요.”
Q : 대학 때부터 가마를 운영하시다니 부잣집 아드님이셨나 봅니다. A : “부모님이 서울 방학동·창동 일대 유지이긴 하셨지만 뜻대로 안 되는 장남 때문에 실망이 크셨어요. 현장 수업 차 갔던 이천 가마에 눌러 앉아버린 아들을 40여 일 만에 찾아낸 부모님은 ‘옹기쟁이가 뭐냐’며 화를 내셨지만 결국 장작 가마를 사주셨죠. 이후부터는 알아서 하라며 일절 도와주지 않으셨어요. 가마 운영을 위해 화병을 만들어 종로 꽃집에 내다 파는 게 내 일이었죠.” 1975년 이천에서 부곡리로 공방을 옮기고, 가스 가마를 도입해 소성(흙을 성형한 도자기를 고온에서 구워 형태와 성질을 완성하는 과정) 성공 노하우를 쌓으면서 큰 돈을 벌었다. 홍대 도예과 후배인 아내 한윤숙씨는 생활 도자기를 현대풍으로 디자인했는데, 78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지사 대표 한창기씨에게 납품했던 백자 반상기는 혜곡 최순우 선생이 추천하고 ‘뿌리깊은 나무’가 판매를 보증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공방 직원 수는 130여 명이었다. 신 작가는 이 시기 개인전을 여럿 치르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높였고, 공방을 찾는 선후배 예술인들과 교류도 활발했다.
Q : 전시 작품 중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그린 도자도 보이더군요. A : “박서보·김창열·윤형근 등 많은 분들이 사랑방처럼 공방에 들렀죠. 운보 김기창 화백은 40여 일간 머물면서 도자에 그림을 그리셨고, 장욱진 선생은 술 드시러 오셨다가 취흥에 그림을 그리셨죠. 박서보 선생님과는 논쟁도 여러 번 했는데, 내가 그랬거든요. ‘내 보기엔 딱 벽지인데, 그게 무슨 그림이냐’고.(웃음) 박 선생이 연필로 선을 긋는 초기 묘법에 전념하실 때인데, 처음엔 불쾌해 하시더니 얼마 안 있어 한지의 물성을 발견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당시 예술가들이 들러 차도 들고 술도 마시고 서로의 아픈 곳을 찌르며 자극 받았죠. 어느 날은 박서보 선생이 제가 만든 달항아리를 번쩍 들어서 말도 없이 차에 싣고 가버린 적도 있어요.(웃음) 맘에 드셨던 거죠. 지금도 박서보 미술관에 그 달항아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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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녹슨 산업기기들을 모은 이유가 있나요. A : “이 동네가 군사지역이라 폐군용 물자에 관심이 먼저 갔어요. 알고 보면 군복을 비롯해 군용 제품들이 소재도 좋고 퀄리티가 좋아요. 이걸 더 파고 들다 보니 산업혁명하고 연결이 됐죠. 그때 만든 물건들이 디자인이 정말 좋거든요. 누군가 내 수집의 핵심을 묻는다면 ‘파티나(patina)’, 녹슨 상태의 것을 좋아한다고 답하죠. 그건 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이니까요. 완전히 ‘새로운 것’ ‘우리만의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은 섞이면서 변화하고 발전하죠.”
Q : 수집품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은 뭔가요. A : “당연히 아프리카 공예품들이죠. 나를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였으니까요.”
Q : 작가님에게 아프리카는 어떤 의미인가.
A : “예술의 본류를 찾은 곳이죠. 서양미술이 19세기 말부터 더 이상의 철학적 콘텐트를 찾지 못했을 때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길을 찾죠. 피카소도 그렇고. 이후 현대 미술은 교육을 통한 지적인 아름다움과 자연 그대로인 원시적인 아름다움 두 갈래로 성장하고 있어요. 흙은 색깔 표현에서 자유롭지 못한 소재에요. 색이 자유롭지 않으면 작가의 표현도 한계에 부딪치죠. 색이라는 언어를 자유롭게 쓰려면 어떡할까 고민할 때 아프리카 원시미술을 발견했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옷에도, 몸에도, 물건에도 자유롭게 색을 그리는 모습이 강한 자극을 줬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작업한 ‘아프리카의 꿈-토템’ 시리즈.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95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린 아프리카 관련 전시를 보고 그는 바로 아프리카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러기를 수십 번. 그의 스튜디오에는 작은 아프리카 박물관을 차려도 충분할 만큼 수많은 공예품이 쌓여 있다. ‘아프리카의 꿈’ 연작 등 작품 활동에도 원초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반영됐다.
박서보·김창열·장욱진 등 공방 단골
Q : 남은 생애는 느티나무를 그리며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A : “이 동네에 처음 들어올 때 느티나무 수십 그루를 심었어요. 나를 50년이나 지켜본 느티나무들이 고마워 이걸 ‘그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자 생각했죠. 어느 날 느티나무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잎 사이로 빛이 반짝이면서 색이 계속 변하더군요. 구운 흙 위에 아크릴 물감을 떨어뜨려 색을 입히는 ‘그림’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도자 회화 ‘묵시록’ 시리즈의 시작입니다.”
Q : 여러 장르를 경계 없이 오가는 추진력은 어디서 올까요. A : “누구는 평생 점만 찍고, 누구는 평생 물방물만 그리는데(웃음) 기질적으로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계속 또 다른 걸 찾아내고, 길이 없으면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평생 한 우물만 파도 좋겠지만, 흙은 고갈되지 않는 자원이니 아이디어도 고갈시키지 말고 계속 전진하자며 지금까지 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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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기자 admin@slotnar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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