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작가가 1976년 작업한 연필 드로잉 작품 ‘무제’. 2층 승강기 맞은편 벽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노형석 기자


50년 동안 종이 위에 긋기만 했다. 연필과 볼펜으로 신문지와 잡지 등에 수없이 선을 긋고 그었다. 그렇게 중첩된 연필의 흑연층과 볼펜의 잉크층이 종이의 활자들을 덮어버리고, 눌러서 그은 흔적이 쌓이고 쌓이면서 표면은 찢기고 너덜너덜해졌다.
82살 나이로 지난 9월 세상을 떠난 최병소 작가는 평생 이런 몸짓을 하며 종이를 변모시키는 작업을 지속했다. 30대 청년 작가 체리마스터모바일 였던 유신 시절, 계엄과 긴급조치로 얼어붙은 시국 아래 검열로 제구실 못하는 신문지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다 착안한 활자 지우기 작업이었다. 현실 비판적 감수성에서 출발했던 지우기 작업은 수행적 행위를 통한 물성의 탈바꿈과 새로운 조형적 세계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단색조회화와 차별화한 한국적 모더니스트의 반열에 그를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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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층 전시장에 내걸린 최병소 작가의 2012년작 ‘무제’. 신문지 위에 연필선을 수없이 긋고 그어 거뭇한 연필의 흑연층이 활자를 덮었고 긋는 흔적이 쌓이고 쌓이면서 표면이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졌다. 작가는 수십년간 신문지나 잡지 등의 종이 위에 연필로 긋기 작업을 지속하면서 특정한 종이의 정체성과 물성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을 몸짓으로 바꿔버리는 수행적 흔적들을 남겼다. 노형석 기자


지금 서울 북촌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종이를 주제로 마련된 기획전 ‘가위, 바위, 보: 종이의 변주’전 현장에서 그의 대표작들을 볼 수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사진잡지 라이프, 한국 신문지의 표면을 새카맣게 칠해 제호 등만 남기고 사이다릴게임 먹빛의 갈라진 종잇조각으로 만든 구작들이 지하 전시장에 내걸려 있다. 수십년간 신문지, 잡지 등 종이에 연필로 긋기 작업을 지속하면서 특정한 종이의 정체성과 물성을 몸짓으로 바꿔버리는 수행적 흔적을 짚어보게 된다.
전시는 미술가의 필수 재료인 종이의 물성과 개념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려 한 한국 근현대 주요 작가 27명의 작품 86점을 1· 쿨사이다릴게임 2층과 지하 전시장에 나눠 펼쳐놓았다. 최 작가를 필두로 지하 전시장에 나온 원로 작고 대가들과 소장 작가 작품들이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모양새다. 최 작가의 작품들 옆에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신성희 작가의 개성적인 도려낸 종이 그림들이 붙어 있다. 선이나 점이 그려진 종이 화폭의 몇 부분을 도려내 매듭이나 덩어리를 지게 한 뒤 그 구멍과 종이 덩어리, 화면 사이에서 입체와 평면의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특유의 ‘공간탐색’ 연작이 또 다른 차원에서 종이 매체에 대한 상념을 일으킨다.



지하층에 내걸린 신성희 작가의 1982년 작 ‘공간탐색’ 연작의 세부. 노형석 기자


두 대가의 작품이 놓인 전시장 한가운데는 흐늘거리는 수십여개의 종이 차일을 늘어뜨려 무속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원로 대가 이승택의 설치물 ‘종이나무(바라)’도 보인다. 정밀한 연필 드로잉으로 해변의 파도 치는 풍경을 사진처럼 떠서 옮긴 이강승 작가의 소품 등도 눈길을 붙잡는다.
2층 전시장은 승강기 맞은편 벽에서 관객과 만나는 이우환 작가의 1976년 작 연필 드로잉 ‘무제’가 단연 돋보인다. 죽죽 그은 연필선을 빽빽한 구도로 배치한 이 소품에서 장년 시절 작가의 조형적 몰입감과 기백을 느낄 수 있다.
가위 바위 보 놀이에 빗대어 잘라내고 응축하고 포용하는 종이의 속성을 탐구했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종이에 대한 작가들의 조형적 시도를 깊이 있게 파고든 기획은 아니다. 이 전시의 매력은 기실 이 화랑만이 수소문해 선보일 수 있는 대가들의 낯선 그림들이다. 큰 물고기를 안고 안온한 표정을 머금은 소년을 담은 그림이나 자식들을 캔버스에 그리는 정경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이중섭의 소품·은지화, 명화 그림 포스터에 티브이(TV), 술잔 등 낙서풍 그림을 그려넣은 백남준의 종이 작품, 수수하고 맑은 김종학 작가의 초기 설악산 시절 풀꽃 그림 등이 감상의 재미를 더해준다. 12월21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